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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8 벧전3:8-22 가이드

벧전3:8-22, 암송 구절 벧전3:9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올려 드리는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이 사탄이라면,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사람들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대부분 우리에게 잘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도 또한 선하게 대응하게 되지만, 우리를 악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선하게 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이겨내면 그로 인하여 우리 마음도 편안해 지고 또한 그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지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지지난 주에 황제나 총독 혹은 주인이 부당하게 대하더라고 존대하고 순종하여 부당한 고난을 견디라고 권면했던 것처럼, 이방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면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한단계 더 나아가 오히려 상대방의 복을 빌어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 함께 살펴 보고 은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먼저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라는 접속구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지난 2:11-25에서 이방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가르침으로써 황제와 총독과 주인에 대해서는 존대하되, 그들로 인해 부당한 고난을 받아도 참고 견디라고 한 권면의 말씀과 이어지는 3:1-7에서 이방인들 앞에서 크리스쳔 부부로서 아내는 남편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길 것을 권면한 것에 추가하여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3:8-22에서는 이방 사회에서 살면서 이웃들이 크리스천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여러가지 악을 행하고 모욕을 줄 때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함을 말씀하면서 그에 필요한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성품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면서 크리스천들은 부당한 고난을 이겨낸 그리스도와 노아를 본 받아 끝까지 견디고 승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첫번째 단락인 3:8-12까지에서는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이방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되, 그들에게 악하게 대하고 모욕을 주는 외인들에게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혀를 금하여 악한 말과 거짓을 말하지 말고 오히려 선을 해하고 화평을 구하도록 힘쓰되, 오히려 그들의 복을 빌어 주라고 권면하면서,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의인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나 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이어서 두번째 단락인 3:13-17에서는 선을 행함에도 고난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서,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또한 복있는 자라고 하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도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히 여기고, 또 이런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그들에게 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답하되, 선한 행동을 하도록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햐고 있습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3:18-22 에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모든 권세들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던 것과 또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의를 전파한 노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모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그 가족들을 구원해 주셨던 것을 예로 들면서, 이방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세상의 모욕과 핍박을 인내하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5) 오늘 본문에는 3: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는 난해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a) 첫째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 전 3일 동안 예수님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셔서 거기에 있는 노아의 홍수 때 죽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해석인데, 여기에는 “구약 시대에 죽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 혹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음부에 내려간 천사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다양한 변종의 해석이 있습니다. b) 둘째는 “예수님께서 노아의 훙수로 심판받아 현재 음부에 있는 이들에게 홍수전 노아의 입술을 빌어 회개할 것을 선포하셨다”는 해석이며, c) 세번째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전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신데로, 죽으신 후 예수님의 영은 하늘 나라에 올라가 거기서 최종 승리를 기다리는 영들에게 예수님의 승리를 선포하였다”는 해석입니다. 칼빈의 주석이나, 윌리암 달톤의 책 “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포: 벧전 3:18-4:6 연구”에 의하면, 첫번째 해석은 노아 홍수전 120년의 유예기간동안 회개를 촉구한 점 (창 6:3)과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 등에 위배되며, 두번째 해석의 경우는 주님께서 택자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현재 문맥과 맞지 않는 바, 캘빈을 따라 셋째 해석을 따를 수 있는데, 이 때는 옥에 있는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φυλακή (phylake,푸라케)”가 감옥이란 뜻도 있지만 안식처라는 뜻도 있기에, 본문의 의미는 칼빈이 제안한데로 “그가 또한 영으로는 안식처에 있는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로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6)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은혜받기를 원하는데, 첫째 베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이방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보여주어야 할 품성으로 한 마음이 되는 것과 서로의 아픔에 동정 즉 체휼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것과 겸손한 마음 가짐과 함께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복을 빌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체휼은 헬라어 “συμπαθής (sympathes,심파쎄스)” 인데, 영어로는 Sympathy 로, “함께” 혹은 “같이”를 뜻하는 syn 또는 sym 과 감정을 뜻하는 πάθος (파토스)’의 합성어로, 상대방의 입장과 같아지고 그 어려움을 나의 것으로 동일시하여 떠 안는다는 뜻이 있으며, 불쌍히 여기는 이라고 번역된 “εὔσπλαγχνος (eusplanchnos, 유스프랑크노스)”는 영어로는 compassion 인데 함께 라는 의미를 가진 com 과 감정이란 단어에서 온 passion 의 합성어로 느낌을 나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8절에서 베드로는 이방 사회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도덕적으로 뛰어난 성인군자들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아픔과 부족함을 품어주는 마음이 하나된 겸손한 공동체여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점은 개인주의적이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좋아하는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의를 위한 고난에 대한 것인데, 우리는 흔히 정의를 위해 투쟁을 해야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의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마 5:10 산상수훈에서도 주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의를 위하여 박해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즉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고 심지어 복을 빌면서까지 고난을 감내해야 할까요? 그것은 먼저 롬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듯 원수 갚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증오로 맞대응하게 되면 실은 그 증오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파괴되어 우리의 마음이 평화를 잃아 버리게 될 뿐 만 아니라 그렇게 악을 악으로 대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사탄에게 진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롬 5:9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아는 우리는 또한 의를 위하여 원수된 자들을 참고 오히려 선을 베푸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로 오늘 베드로가 권면하는 것처럼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양심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의 마음에 양심을 두셔서 그 양심이 하나님의 법을 나타냄으로 우리 인간이 그 양심에 따라 행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타락함으로 그 양심이 오염되고 더럽혀져서 그 기능이 많이 쇠퇴하여 졌지만 여전히 양심은 롬 2:15 말씀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거듭나게 되면, 이 양심이 더욱 깨꿋하여 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삶을 살도록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한 크리스천들은 마음 깊은 곳의 선한 양심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옵기는 우리 교회는 이렇게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사람들에게 악을 선으로 이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더욱 선한 양심으로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소그룹 모임 가이드 및 예제 질문

Q1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의를 위한 고난도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의를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며 심지어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의를 위해 고난을 받아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또 축복인지 생각해 보고 서로의 생각을 함께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Q2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가 되라는 말은 생각이 서로 같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서로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된다는 말일까요? 갈 3:28 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시고 골 2:2 에서는 사랑 안에서 연합하라고 하십니다. 크리스천의 하나됨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이나 경험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Q3 롬 2:15과 오늘 본문을 보면 기본적으로 믿지 않는 이나 믿는 이가 도덕적인 선한 삶을 살게 되는 원리는 같아 보이는데 그것은 양심을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특히 크리스천들은 중생할 때 양심도 또한 깨끗함을 받기에 이제 선한 삶에 대한 양심의 부담이 점점 더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혹 중생 전후에 그런 차이를 느끼신 것이 있으시면 서로 경험과 생각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기도 노트

( 오늘 말씀중 깨달아진 하나님의 성품 ) 하나님 아버지!

( 지난 한주간 혹은 오늘 하루 동안 감사한 일들 ) 해 주심에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 깨닫게 해주신 죄 )를 깨닫게 해주셨음에 감사하며,

회개할 때에 용서해 주옵시고 이제 ( 새 삶 )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하여 ( 새롭게 배운 점 ) 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하며

( 삶의 도전 )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 주님의 성품 ) 우리 주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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