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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6 벧전 2:11-25 가이드

벧전2:11-25, 암송 구절 벧전2:17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올려 드리는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 사랑과 공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두가지 삶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 인하여 오염되고 파괴된 이 땅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부당함과 불의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우리가 잘 아는 가장 일반적인 세상 원리는 도피를 하거나 아니면 투쟁을 하는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3의 길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비폭력적 저항의 방법 입니다. 즉 폭력과 불의에 맞서되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것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이끈 간디의 비폭력 독립 운동이나 미국 흑인 운동을 이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노예 해방 운동과 일제 치하 폭력적 군정에 반기를 든 비폭력 만세 운동인 3.1 운동 등 많은 비폭력 저항 운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폭력과 불의에 비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비겁한 도피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폭력족 저항 운동이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반면, 이러한 비폭력적 저항은 악의 본질을 드러내어 결국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그 룰을 바꾸는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베드로는 왕이나 총독 혹은 고용주 때문에 부당하고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왜 그런 권면을 했는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먼저 벧전 1:1-2:10 까지는 본 서신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전체 서선서의 신학적 기초 작업에 해당하는데, 이 서론에서 베드로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중생하였기에, 심지어 고난 가운데도 참소망을 붙들고 기쁨으로 이겨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구원에 이르기까지 택자를 견인해 주실 뿐 만 아니라, 고난을 통해 연단받은 믿음은 결국 주님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따라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써 거룩하고 의롭게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2) 그리고 이어서 본 서신서의 본론인 2장11절부터 4장19절에서는 이방 사회에서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들을 가르쳐 주는데, 먼저 오늘 분문인 2:11-25 에서는 일반적인 사회 생활의 지침과 함께 로마 황제와 총독 그리고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3:1-7 에서는 부부에 대한 삶의 지침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3:8-4:19 에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의 구체적인 지침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특히 오늘 본문 2:11-25에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 2:11-12 에서는 불신자들로 구성된 이방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삶의 지침에 대해서, 그리고 2:13-25 에서는 로마 제국의 한 시민으로서 황제와 총독 그리고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삶의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는데,

4) 먼저 베드로는 이방 사회에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선한 행실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어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페코 (ἀπέχω, apechō)‘는 멀리하다(be away from), 피하다(avoid), 삼가다 (abstain)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 시제로 쓰인 점을 감안하면, ‘지속적으로 육신의 죄된 욕구를 멀리하며,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삼가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년 동안, 가장 측근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주님을 쫓았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 대속 사역을 앞 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할 것이라고 예언해 주시자,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대들기도 했고, 또 주님께서 달리시기 전날 밤 로마 군병에게 잡혀 대제사장의 뜰로 잡혀 가셨을 때, 비록 용기를 내어 예수님이 잡혀 가신 그 뜰 안까지 따라 들어갔지만, 결국 그를 알아본 여종들 앞에서 저주까지 하면서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베드로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이제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쫓아 가는 베드로가 ‘육신의 정욕이 일어날 때 마다 그것을 멀리하며 그것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때, 십자가에 못박힌 채 아직 신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육체의 정욕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의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으로, 그래서 ‘영혼을 거스런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스트라튜오 (στρατεύω, strateuo)가 ‘군인으로 봉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형으로 쓰인 것을 감안하면, 결국 우리의 영혼을 거슬러 ‘지속적으로 싸우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5) 그리고 이어서 2:13-25 까지에서는 황제와 총독 그리고 고용주(주인)이 가진 권세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는데, 먼저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와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권면하면서, 인간의 상하 좌우 모든 관계에 대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뭇 사람을 공경하며 왕을 존대하라 (17절)”는 기본 원칙을 세워 주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오직 유일하신 신으로써 창조주요 섭리주요 심판주로 알아 경외하라는 말씀이며, 주님께서 피값주고 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형제 자매를 사랑하라고 권하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담지자로써의 인간 존엄성을 근거로 공경함과 동시에, 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 세상에 세우신 여러 권세들을 존대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6) 이에 대해서 부연 설명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스리실 때, 왕 혹은 정부라는 시스템을 통해 다스리시며 이를 위해, 다스리는 자에게 선을 행하는 자를 포상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셔서, 세상의 질서를 세워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고 또한 왕과 총독에게 존대하라고 오늘 본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제정해 주신 십계명에도 분명히 나와 있는데, 십계명의 두번째 파트인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중 첫번째 계명인 제5계명에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해 존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7) 그런데, 여기서 “뭇사람을 공경하며”와 “왕을 존대하라”에 쓰인 헬라어는 ‘τιμάω’(timaō)’ 인데, 존경하다 (respect), 존중하다 ()honor) 혹은 경외하다 (revere)의 뜻을 가지고 있는 바, 여기서 모든 사람과 왕에 대해서 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 점은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왕이나 모든 사람을 공경함에 있어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존중해야 할 이유는 다른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 담지자이기에 그들의 인간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며, 왕이나 총독등 권세자들은 그에게는 하나님으로 부여 받은 권위가 있기에 그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두 경우 모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바탕으로한 존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8)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의 권세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귄세자들이 선하고 온유하며 정의로 다스린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까탈스롭고 고약하며 때로는 부당하거나 혹은 애매한 판결로 말미암아,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고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이렇게 부당한 고난마저 참기를 권면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이 부당한 고난을 말없이 참고 인내하심으로 인류에 대한 대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신자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가지 은혜 나누기를 원하는데, 먼저, 이런 베드로의 권면은 무슨 불의를 용납하거나 불의를 보고도 도망가라는 뜻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증거하듯 우리 크리스천들은 죄와 불의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라도 투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폭력적 투쟁이 아니라, 비폭력적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2-23에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불구하고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시며 십자가에 까지 죽으셨는데, 그 이유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며, 또한 주님께서 맞으신 채찍을 통해서 우리의 깊은 죄가 치유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죄와 불의의 폭거에 대한 비폭력적 투쟁은 폭력의 허구와 불의를 세상에 드러내고 동시에 그에 대한 판결과 심판을 가장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에서 가장 적극적인 투쟁인 것이며, 동사에 인간의 첫 죄로 말미암아, 선악간에 우리 스스로가 판단함으로 결국 심판자의 자리에 앉은 우리 인간의 깊은 죄를 치유하시는 주님의 고난에 우리도 동참함으로 그 깊은 죄를 치유받고, 또 최종 판결과 심판의 자리를 하나님께 다시 올려드림으로,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보다 근본적인 투쟁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부당하고 애매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첫 죄를 지었을 것을 아시고, 창세전에 세분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속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은혜를 중심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은혜를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작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자 말자 한편으로는 그 죄에 대한 책벌을 주셨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시고, 원시 복음을 선포해 주심으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에도 모든 인간들의 죄가 이 땅에 관영하여 홍수 심판을 하실 때도 노아의 가족 8명을 살려 주셨는데 그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당하게 대하며 다시 죄를 짓는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 부당함을 참아 주고 계시는데 만약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다, 그에 합당한 형벌을 내리셨다면, 한사람도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며, 또한 그의 택한 백성들이 그렇게 살아 가기를 의도하셨던 바, 우리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음으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할 뿐 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고난을 통해 마침내 영광을 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0) 마지막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당한 일이나 애매한 일을 당할 때의 사회 생활의 원리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만으로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옳은 일을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그 위대한 일은 바로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서 생기기 보다, 부족하고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당함을 말없이 당해 주고, 그 부족함을 품어 주며, 변할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려 줄 때, 비로서 바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러한 삷을 살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2~3세기 무렵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도 보면 당시의 크리스천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데, 그 편지에는 다름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언어나 어떤 풍습 때문에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의 지역 문화에 동화되어 살아 가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천국 시민의 특징들을 보여 주었는데, 그들은 그 나라의 시민법을 지키면서도, 그 법을 넘어서는 독특한 생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선하게 살아감에도 악인인 것처럼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벌을 받을 때에 오히려 기뻐하였는데, 그들을 핍박했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왜 크리스천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며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12) 기도하옵기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한 사랑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는 심지어 부당하고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조차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쫓아 참고 인내함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그룹 모임 가이드 및 예제 질문

Q1 오늘 본문 말씀은 부당하고 애매한 고난을 받기를 싫어하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참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크리스천의 본질은 그런 부당하고 애매한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것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삶을 돌아보며, 혹 부당하거나 애매한 고난을 받은 때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주님의 본을 쫓아 참고 인내했던 경험이 있으시다면 함께 나누어 주시면서 서로 은혜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Q2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아랫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편하게 해 주는 좋은 리더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건데, 완벽한 리더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까탈스런 지도자를 만나 부당하고 애매하게 고난을 받더라도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 그러한 권세자를 세워서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위를 부정하는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살면서,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이 진부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왜 베드로가 그런 권면을 했는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시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기도 노트

( 오늘 말씀중 깨달아진 하나님의 성품 ) 하나님 아버지!

( 지난 한주간 혹은 오늘 하루 동안 감사한 일들 ) 해 주심에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 깨닫게 해주신 죄 )를 깨닫게 해주셨음에 감사하며,

회개할 때에 용서해 주옵시고 이제 ( 새 삶 )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하여 ( 새롭게 배운 점 ) 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하며

( 삶의 도전 )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 주님의 성품 ) 우리 주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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