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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25-23 롬3 가이드

롬3:19-31, 핵심 구절 롬3:23-24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올려 드리는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오늘 2025년 열 여덟 번째 주일을 맞아,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은택들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또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영광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같이 살펴 보았는데, 이번 주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같이 한번 알아 보고 함께 은혜 받을 수 있기를 소망 합니다.

1)  먼저 오늘의 본문인 롬 3:19-31 말씀을 요약해 보면, 바울은 먼저 죄에 관한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 즉 그의 전 생애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 순종하심으로 인간을 대신하여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의 길 뿐이라고 하면서, 이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으며,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은 또한 율법을 행하여 이루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이 본문은 루터가 그의 성경 여백에는 3:21-26 옆에,“로마서와 성경 전체의 요점이며 매우 중심이 되는 곳이라는 메모를 남겼고, 그 외에도 다수의 주석가는 로마서의 이 단락을 거의 열광적으로 칭송하며 비슷한 견해를 표현했는데, 예를 들어 찰스 크랜필드는 3:21-26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 짧은 단락은 이 본문이 속한 주요 단락의 중심이며 심장”일 뿐 만 아니라 “롬 1:16-15:13 전체의 중심이며 심장이기도 하다”고 선언했고, 에른스트 케제만은 “칭의 교리가 바울의 신학과 이 편지의 중심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본문의 논의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은 존 지슬러가 “바울의 본문 중에서 이 본문보다 더 의미심장하거나 논쟁의 대상이 되는 본문은 적다”라고 이야기 한 것처럼, 이 본문은 정확하고 통찰력 있게, 그리고 이해력을 가지고 다루어야 하는데, 본문 3:21-31 에는 기독교 복음의 세가지 중요한 초점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첫째는 구원의 주요한 기초이며 원천인 하나님의 의, 두번째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객관적인 수단인 그의 생애 즉 그의 능동적 순종과 그의 죽음 즉 그의 수동적 순종에 나타난 예수의 신실함,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는 이 하나님의 방책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유일한 적절한 반응으로서 사람들의 믿음인데, 이 세가지는 기독교 메시지에 반드시 포함하여 선포해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본질적인 속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들에게 주시는 중요한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데, 만일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의롭고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다른 주장도 전부 불가능하며, 더욱이 하나님이 (a) 회개하여 자기에게 다가오며 사죄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b) 겸손히 자신을 의존하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시고, (c) 하나님의 백성과 궁핍한 사람들, 특히 절말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과 힘을 간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공의를 드러내시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절망적일 것입니다. (리처드 롱네커, NIGTC) 그리고 22절에 나오는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은 갈 2:16과 3:22, 엡 3:12과 빌 3:9에도 등장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은 구원의 객관적인 수단인 생애를 통한 능동적 순종과 그의 십자가 죽음에 나타난 수동적 순종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실함을 말하는 것으로  토머스 토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피스티스(pistis)의 성육신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의 피스티스를 구현하고 실현하시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의의 구현이며 실현이시기도 하다”고 말했으며 마르쿠스 바르트는 “성자는 재판장이신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아 이를테면 하나님의 수동적인 도구가 되신 것만은 아니다. 그분은 그의 직책을 순종하러 오심으로써 그의 사명에 순종하기도 하셨다”고 하면서 “그의 등장으로, ‘믿음이 왔다’…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과 사람을 향한 사랑은 동시에 동일한 행위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말했습니다.

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25절에서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화목제물’(和睦祭物)로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인데 히 9:5에서 ‘속죄소’(贖罪所)로 번역되었듯, ‘속죄소’ 혹은 ‘속죄단’(贖罪壇)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는데, 이것은 언약궤(증거궤) 윗부분의 ‘덮개’를 가리키는 말로 레 16:13–15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증거궤 위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수염소의 피를 뿌리는데, 이 ‘속죄소’는 히브리어로는 캎포렛(כַּפֹּרֶת))인데 ‘덮다’(cover)는 뜻의 카파르(כָּפַר))에서 왔으며, 이는 곧 언약궤 위의 ‘덮개’로서 백성의 죄를 덮어 속죄한다는 의미이며, 이 캎포렛을 칠십인역은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으로 번역하였는 바, 이를 속죄소 혹은 속죄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며 또한 롬 3:25의 문맥도 ‘속죄단’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데,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돌비 두 개가 들어 있었고 또 십계명은 율법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정죄하는 기능을 하여, (롬 3:19–20) 율법 앞에 서면 모두 다 정죄함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지만(롬 7:12–13; 삼상 6:19–20; 삼하 6:6–7 참조). 그러나 감사하게도 언약궤 윗부분에는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캎포렛)가 있어(출 25:17) 이 위에 수송아지와 수염소의 피를 뿌림으로 율법의 정죄가 그룹들 사이에 계신 하나님(민 7:89)께 상달되지 못하게 막아주었듯(레 16:14–1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단’이 되셔서 그 위에 그의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가 하나님께 상달됨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한편 속죄소 ‘앞에’ 피를 일곱 번 뿌리는 것(레 16:14–15)은 율법의 정죄가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을 완전히 철저하게 막아준다는 의미이며 또 속죄소 ‘동편에’ 뿌린다는 말(레 16:14)은 언약궤의 윗덮개(속죄단)의 앞쪽 즉 동쪽 표면에 뿌린다는 의미인데, 대제사장이 서 있는 동쪽 즉, 속죄단 표면 전체에 피를 다 뿌리지 않고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 있는 동쪽 부분 표면에만 뿌리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과 율법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항상 원활한 교통이 있지만(롬 7:12) 다만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바 그래서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의 정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도록 속죄단의 표면 중 동쪽 부분에만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화목제물’ 록은 ‘속죄단’로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기의 의로우심’은 원어로 보면, ‘그의 피로’ 바로 다음에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되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피로써 죄 값 즉 사망(롬 6:23)을 다 치루시고 용서해 주셨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이며 의로우심인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용서의 구체적인 방법은 ‘전에 지은 죄들을 간과(看過)하시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간과’(파레시스, πάρεσις)는 지나쳐 버리다, 눈감아 주다는 뜻으로, 우리가 지은 죄들을 못 본 것으로 쳐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법적인 의미로 우리가 실제로는 죄가 있지만 죄가 없다고 여겨 주신다는 의미인데,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죄 없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대한 그리고 이러한 은택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하고 적절한 반응은 인간의 믿음인데, 이 믿음에 대하여, 바울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제기합니다. 즉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31상)라는 질문인데, 여기서 ‘파기하다’(카타르게오, καταργέω)라는 말은 ‘효력이 없게 하다, 또는 무효화하다’라는 말인 바(롬 3:3; 4:14; 6:16 등)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했으니, 그러면 결국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로 말미암아 율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가, 혹은 방종한 삶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바,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모세를 배반하고 율법을 폐한다고 비난까지 하였던 것입니다(행 21:21, 28). 그러나 이에 대한 바울의 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하였던 바(31하), 이신칭의 교리는 결코 율법을 무력화시키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모세의 율법 자체가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 말하고 있는 바 행함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는데, 로마서 2:21–22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도덕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사람은 ‘참 유대인’이 되어 오히려 율법의 내용을 행하게 되는 바(갈 6:2; 약 1:25; 2:8, 12) 결국 참 믿음은 참된 의미의 순종을 가져온다는(롬 1:5; 16:26) 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세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신칭의 교리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바, 믿음은 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든든히 세우기에, 소위 “믿음은 좋은데 윤리는 좋지 않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로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윤리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벨직 고백서 제20조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자비로우며 또 전적으로 정의로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 본성을 취하시고 그 본성으로 죄의 값을 치르도록 가장 괴로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죄의 벌을 짊어지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자기에게 돌리셨을 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대하여 자기의 정의를 발휘하셨고, 그리고 죄를 짓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단순하고 완전한 사랑으로 자기의 자비와 선의를 쏟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시고, 그리고 그를 통하여 우리가 불멸과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는데,

6)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자기에게 돌리셨을 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대하여 자기의 정의를 발휘하셨고, 그리고 죄를 짓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단순하고 완전한 사랑으로 자기의 자비와 선의를 쏟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불멸과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라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래서 요일 3:1 에서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7)     그리고,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실 뿐 만 아니라,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율법의 죄책을 지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공의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그 누구도 심지어 참소하는 자, 사단 마저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면서 또한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방법인 것입니다. (변종길. 로마서  주석)

8)     그런데,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는 이 믿음은 단순히 선포된 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거룩함 즉 하나님과 가까이 있고,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성화로 이어지는 바,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옵기는 올 한해 우리들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하나님의 의가 결국 실제적인 삶에서 거룩성으로 나타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그룹 모임 가이드 및 예제 질문

Q1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완전한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살펴 보았고, 이는 결국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지는데, 이는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잠시 믿음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팀원들과 나누면서 은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Q2 그리고, 이 믿음은 단순히 생각이나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JI 페커는 거룩함이란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는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잠시 각자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거룩함에 까지 이르렀는지 돌아보고,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팀원들과 나누면서 은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기도 노트

(  오늘 말씀중 깨달아진 하나님의 성품  ) 하나님 아버지!

(  지난 한주간 혹은 오늘 하루 동안 감사한 일들 ) 해 주심에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        깨닫게 해주신 죄          )를 깨닫게 해주셨음에 감사하며,

회개할 때에 용서해 주옵시고 이제 (  새 삶  )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하여 ( 새롭게 배운 점 ) 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하며

(    삶의 도전     )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 주님의 성품 ) 우리 주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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