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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24-15 마18 가이드

마 18:15-20, 핵심 구절 마 18:19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올려 드리는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사순절 네번째 주일을 맞아,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에 걸쳐 마태 복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특히 이번 주에는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통해, 마태가 전하는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해서 살펴 보고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지난 몇 주에 걸쳐 살펴 본 것처럼, 마태 복음은 마태가 AD 66-74 년 사이에 발발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끝난 AD 75-80 년경 사이에 유대 개종자들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가 점점 유대 공동체로 부터 독립해 나가던 시기에 기록한 복음서로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 당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을 지켜 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새롭게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그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은 교회 공동체와 제자들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쓰여 졌는데, 이렇게 마태가 새롭게 제시한 교회에 대한 신학적 기틀에 대해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 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상황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무슨 말인가 하면, AD33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AD 34년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유대교로 부터 큰 박해를 받게 되자 사도 외에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이 뿐 만 아니라, 이들은 행 11장에 기록된 것처럼,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단 지중해변을 따라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리비아의 구레네 까지 그리고 또 북쪽으로는 레바논의 베니게와 시리아 안디옥에 이르기 까지 흩어져, 주님의 교회 공동체들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30여년이 지난 AD 64년에 발발한 로마 대화재로 인하여,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이 방화를 했다고 소문을 퍼뜨림으로, 기독교 인들에 대한 박해가 로마를 시작으로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던 중 AD 66년에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를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열심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유대 해방 운동이 일어 났고, 이때 대제사장 아나니아스의 아들 엘레아살이 성전에서 드리던 로마 황제에 대한 제사를 중지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제1차 유대-로마간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때 네로 황제가 그의 용장 베스파시안을 파병하여, 우여 곡절 끝에, AD 67년 갈릴리 지방이 점령당하고 AD 70년 에는 예루살렘성이 함락당하여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AD 74년에는 최후 항전을 벌이던 마사다가 포위되어 압박 당하자 이에 유대 반란군이 모두 자결함으로써, 로마의 승리로 전쟁이 종료되는데, 이 유대-로마간 전쟁때에 AD 70년 성전이 파괴된 사건은 그동안 성전을 중심으로 모든 예배와 삶을 영위해 왔던 유대 공동체와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게 엄청난 도전과 혼란을 일으켰고, 이에 이들 두 공동체는 이제 신성한 성전이 사라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의 상징이었던 하나님의 임재를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또 하나님의 자비와 속죄를 이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3)     이 신학적 도전에 대하여, 유대 공동체는 그동안 반로마 진영을 구축했던 열심당과 사두개파와 에스네파가 유대-로마 전쟁으로 거의 전멸하다 시피하여 힘을 잃어 버린 후, 헤롯 대왕시대 이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주로 민간 경건 운동을 주도 해왔던 온건주의의 바리새파 만이 살아 남아 유대교 회복 운동을 진행 하였는데, AD 90년 이들의 리더였던 랍비 요하난 벤 짜카이 Yoyanan ben Zakkai 를 주축으로 얌니아 회의를 거쳐 더 이상 성전과 희생 제사에 의존하지 않고 호세아 6:6 말씀을 통하여, 성전 제사 대신 인애를 강조하는, 예쉬바 (Jeshibah) 즉 토라 연구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랍비 유대교”를 출현 시킨 후 2-3세기를 거쳐 더욱 발전해 나간 반면

4)     이 유대-로마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바로 직전 요르단 강 건너 ”펠라”라는 도시로 피신한 교회 공동체는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로 부터 완전히 배척을 당하고 심지어 파문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으로 먼저 마태는 예수님을 성전 보다 더 크신 분으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면서, a) 이렇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예배 공동체 가운데서 (18:20), 그리고 주님을 위해 핍박 받는 작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역을 통해 (25:31-46) 그리고 제자 되어 제자 삼는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으며, b) 또한 십자가 대속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마14:24, 26:28), 메시아로 고백하고 주님을 믿고 영접한 후 그에게 헌신하여, 그를 따르는 자는 용서를 얻을 수 있으며, c) 그리고 모세 율법의 참 의미를 해석해서 가르쳐 주신 참 율법 선생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며, 이 교회를 음부의 권세로 부터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또한 이 교회에 천국의 열쇠 즉 “하나님의 통치의 복음”을 (마 4:23; 9:35) 전파하고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하고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는 권한을 주셨는데, 이렇게 이제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용서와 뜻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임을 주님께서는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마태 복음에만 나오는 단어로 실은 70인역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아래에서 특별한 삶의 방식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부를 때 사용했던 히브리어 “카할”에 대한 헬라어 번역으로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주님께서 이 “에클레시아”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이제 주님의 교회가 참 이스라엘의 위치를 계승하였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6)     그런데, 마태 복음 5장과 12장 18장 말씀들을 보면, 이런 주님의 교회 안에도 구성원들 간의 내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은 유대 전통과 율법에 대한 입장 차이, 즉 친율법 세력과 반율법 세력간 갈등과, 로마 제국에 대한 입장 차이 즉 반로마 세력과 친로마 세력간의 갈등 그리고 선교에 대한 갈등 등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인용하여, a) 유대 전통과 율법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광범위한 율법 해석(5:21~48; 22:37~39)과 함께 율법의 영속적인 타당성에 대한 강조(5:17~20; 24:20) 등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함으로 율법과 은혜를 조화시켰고, b) 선교에 대한 입장 차이는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연속성을 존중하면서도 비연속성을 강조하여, 이제 유대로 부터 파문 당해 더이상 유대인 선교가 불가한 상황에서 이제 복음은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세계로 향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의 복음서 마지막을 세상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대 위임령으로 마무리 하였으며, c) 또 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정치적 입장 차이를 뛰어 넘어 화해와 용서의 공동체로 세워져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산상수훈의 평화를 전하는 자가 바로 그런 자라고 말하였는데, 오늘 본문인 18장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7)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 본문이 나오는 18장은 세부분으로 나뉘어, a) 1절에서 14절까지는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크다고 하시며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고, 길잃은 양 한마리를 찾는 교회가 되라고 하신 후 b) 이어진 15절에서 20절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순전하게 지켜갈 것인가 즉 교회의 치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c) 마지막으로 21절에서 35절에서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를 통해 교회가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는데,

8)     특히 오늘 본문인 15절에서 20절은 한편으로는 교회내의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의 절차 즉 일대일로 만나 죄에서 돌이킬 것을 권면한 후, 따르지 않으면 두세 사람이 함께 만나 그의 죄를 증참하되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이야기하는 교회의 치리 혹은 권징에 대한 말씀으로 이는 마 16장에서 말씀하신 천국의 열쇠가 교회의 “치리”를 통해 전체 교회 공동체에 까지 확장 적용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지만 실은 이 교회의 치리에 대해서 우리가 몇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 줄 믿습니다. 첫째 “치리”에 해당하는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치리는 성도가 성경에서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예배 생활을 하지 않는다 거나, 또는 살인, 도둑질, 거짓 증거, 음란의 죄를 짓는다 거나, 혹은 편애와 편파나 이기심으로 주님의 교회를 나누는 죄를 지었을 때, 그 교인을 책망하여 바르게 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성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혹은 능력이 부족하다고, 혹은 기질이나 성품에 문제가 있다고 혹은 서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치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런 치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내에 바른 교육과 훈련이 전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권징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 치리의 목적은 교육을 통한 회개와 용서와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교인을 쫓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권징이 이루어 진다면 이미 이 권징의 참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전에는 어린 아이에 대한 교훈이 나왔던 것이고 본문 바로 뒤에는 용서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신 것이며 본문에서도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는 말씀에 나오는 두 사람도 실은 이렇게 용서와 화해를 이룬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두세 사람도 실은 주님의 용서와 화해를 이룬 두세 사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 바, 우리는 교회가 사람을 세우기 위해 조직되었기에, 권징 또한 교육과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사람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함을 명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9)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 나누기를 원하는 데, 첫번째 마태는 대위임령을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배치하여 선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였는데, 실은 마태 공동체는 작은 자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며 가난하고 비천한 외부자요 주변인에 불과한 정체성을 가진 작은 소수의 공동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동체가 안디옥이라는 대도시 즉 추정인구 5만에서 10만명의 로마제국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로, 도시 면적의 40%는 공공건물과 함께 제우스신이 신들의 뜻을 대표할 지상 대리인으로 로마와 황제를 선택하였다는 제국 신학을 바탕으로 제우스신전과 아폴로 신전과, 아르테미스 신전 등이 가득하였고, 또 중요한 무역로의 교차점이었기에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있는 큰 도시에 대하여 선교와 변혁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아 병자들과, 집 없는 자들과, 배고픈 자들과, 헐벗은 자들과 갇힌 자들을 자비와 긍휼로 돌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와 용서와 자비를 삶으로 살아내고 또 선포하면서, 또 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또 다른 제자들을 찾아 세우는 일을 하였던 것인기에 우리가 이런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작은 공동체로 하여금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하도록 한 힘은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예수님이시라고 마태는 말하면서, 그의 복음서의 마지막 절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으로 끝을 맺었던 것인데, 우리도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칼빈이 16세기 온 유럽이 국교화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이었던 때에,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기를 참 신자는 “거대한 무리 속에 아주 작고 보잘 것없는 숫자로 감추어져 있고 겨더미 속에 그저 몇 알의 알곡처럼 숨겨져 있다”고 하였는듯, 지금 우리의 상황도 한편으로는 그와 비슷한 상황이지 않나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안디옥이라는 거대 이방 도시에서, 작지만 용서와 선교와 변혁의 제자 공동체로 살아갔던 마태의 교회 공동체와 같이 오늘 우리도 음녀와 맘몬이 판을 치는 이 거대한 바벨론 성 한가운데에서, 임마누엘로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쫓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면서 주님의 용서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면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고 또한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회복되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그 날을 향해 오늘도 마노드의 길 그 좁은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그룹 모임 가이드 및 예제 질문

Q1 오늘 본문은 주님의 교회였던 마태 공동체는 소수에 불과 했지만 안디옥이라는 로마의 세번째로 큰 도시에서 변혁과 선교 공동체로 담대히 살아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우리 주님의 제자들의 정체성 즉 비록 작은 소수일지언정 과감하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 보고 우리 안에도 그런 복음의 급진성이 있는지 돌아 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시면서 서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Q2 그리고 또한 그렇게 소수에 불과하지만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선교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일깨워 그로 하여금 우리 삶을 통해서 일하시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서로의 생각을 팀원들과 나누면서 은혜ㅠ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기도 노트

(  오늘 말씀중 깨달아진 하나님의 성품  ) 하나님 아버지!

(  지난 한주간 혹은 오늘 하루 동안 감사한 일들 ) 해 주심에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        깨닫게 해주신 죄          )를 깨닫게 해주셨음에 감사하며,

회개할 때에 용서해 주옵시고 이제 (  새 삶  )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하여 ( 새롭게 배운 점 ) 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하며

(    삶의 도전     )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 주님의 성품 ) 우리 주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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